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난의 변 (문단 편집) ==== 정난군 VS 경병문 ==== 처음 기세를 타고 일어난 정난군은 파죽지세였다. [[통주]](通州), 준화(遵化), 밀운(密雲)은 정난군에게 즉시 항복했고, 북평으로 향하던 '''송충'''은 회래(懷來)로 물러났지만 정난군은 [[거용관]](居庸關)을 함락시키고, 회래까지 즉시 점령해 송충을 포살했다. 이때 황제군은 제태나 황자징이나 학자일 뿐, 장수는 아니라서 주체를 상대할 만한 뛰어난 장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개국공신 대부분은 늙어 죽거나 주원장에게 숙청당해 유명을 달리한 상황이었다. 일단은 장흥후(長興侯) '''경병문'''(耿炳文)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고, 부마도위(駙馬都尉) '''이견'''(李堅), [[도독]] '''영충'''(甯忠)을 좌/우부장군으로 임명하고는 참장(參將) '''[[성용]]'''(盛庸)과 함께 주체를 상대하려는 '''[[북벌군]]'''을 편성했다. 경병문은 당시 나이가 60세가 넘었던 노장으로서 주원장 시대부터 활약하던 장수 중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고, 통솔하던 병력은 '''300,000명'''이나 되는 대군이었지만, 아직 130,000명밖에 먼저 도착하지 않았을 무렵, 정난군의 장수 '''[[장옥]]'''이 황제군을 염탐하고 기습전을 권했다. >'''“군대에 기율이 없고, 그 윗사람들에게는 패할 기운이 있으니 의당 급히 쳐야 합니다.”''' 이에 주체는 호타하(滹沱河) 북측에서 기습공격했다. 이는 대성공으로 끝나 30,000명이나 되는 황제군을 참살했고, 경병문은 진정(真定)에서 수비에 전념했다.('''호타하 전투''') 정난군은 2일간 공성전을 벌였지만 황제군을 격퇴할 수 없자 일단 물러났다. 패배했는데도 황자징은 >"어차피 전쟁하면 이기고 지는 거야 항상 있는 일" 이라면서 조국공 '''이경륭'''의 파견을 주청했다.[* 이경륭의 아버지는 명나라의 개국공신인 [[이문충]]이었다.] 이때 제태는 이경륭은 절대 안 된다면서 말렸지만, 황자징이 밀어붙인 끝에 이경륭이 새로운 정로대장군이 되어 결국 파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